자전거에세이

자전거 처음 타던 날

nuegocci 2016. 7. 24. 23:41

자전거 처음 타던 날


처음 타던 날보다는 배우려고 마음먹고 자전거를 끌었던 날이 더 적절하겠네요. 배우고 나서야 탔으니까요.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제가 자전거를 배우기로 작정하기 1년 전에 동네 또래들 사이에 자전거 배우기 열풍이 일어났습니다. 열풍이 불 때 저는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자전거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목수 일을 다니셨고 집에 세워져 있을지라도 아버지 소유의 자전거를 허락 없이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자전거 배우고 타는 것을 부러운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거의 다 배우고 다음 해가 되어서야 슬슬 자전거 발판[페달]에 발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을길로 가지고 나가지는 못하고 집에서만 연습했습니다. 혼자서.

사진은 한용운 선생의 생가. 제가 살던 집과 흡사합니다.


제가 어려서 살던 집은 말 그대로 초가삼간이었습니다. 부엌, 안방, 윗방. 딱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지붕은 짚이었습니다. 마루가 있었고 뜰팡(뜰, 뜨락)이 있었고 그 아래 마당이 있었습니다. 뒤꼍에는 그늘지는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초가삼간의 큰 특징 중 하나가 분리된 세 개의 공간 중 부엌이 가장 넓다는 것입니다. 부엌에는 아궁이 세 개가 있었고 음식 만드는 공간(부뚜막), 그리고 물 담는 항아리 묻은 공간, 땔감을 쌓아 두는 공간, 찬장 등이 있어서 가장 넓어야 했습니다.

부엌 옆 바깥으로 샴[샘]이 있었습니다. 손으로 펌프질을 해서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이 펌프를 놓기 전에는 마을 공동 샴이 있었고 누나들은 저녁이 되면 그 곳에 가서 물을 길어다 부엌 항아리에 채우고 씻을 물을 다라이에 받아 놓고 일부는 마당에 뿌린 후에 마당을 쓸었습니다. 매일 저녁마다 마을의 거의 모든 집에서 저녁 집안 청소를 했는데 이를 씨서리(?)라고 했습니다.

사진 출처 : http://sagang.blog.seoul.co.kr/175

부엌과 샘 사이에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마당으로 이어졌습니다. 뒤꼍 장독대와도 연결시키는 공간이었습니다. 마당 쪽으로 약간 내리막이었습니다.

자전거는 그 공간과 뒤꼍의 모서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샘 바로 옆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오른쪽 한 발을 발판에 얹고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2발짝이나 갔을까!~~
계속 구르지는 못하고 한 번 구르고 중심을 잃을 때까지 탔습니다. 그래 보았자 몇 미터.
제가 그러는 동안 샘에서는 어머니와 누님들이 음식을 준비하거나 빨래를 하기도 했습니다.

잡아 주는 이도 없고 가르쳐 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만 자전거를 타실 줄 알았습니다. 가르쳐 달라, 잡아 달라 말씀드릴 엄두도 못 내고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틈을 타서 계속 그렇게 탔습니다. 발판은 구르지 못하고 얕은 내리막을 동력원으로 마당까지 갔습니다. 조금 익숙해졌을 때 뒤꼍으로 가는 모퉁이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서 내려왔습니다. 오랜 연습으로 한 발만 발판에 올린 상태로 작은 내리막은 내려올 수 있었지만 그래도 발판을 돌리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키 작은 아이들이 어른 자전거의 발판을 구르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자전거프레임 사이로 다리를 넣고 자전거를 기울여 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큰 자전거의 안장에 올라 한 발로는 발판을 툭 치듯 밟고 다른 한 발은 뒤에서 올라오는 발판을 다시 뒤로 툭 쳐서 크랭크를 뒤로 돌립니다. 그러면 반대편의 되돌아온 발판을 다시 툭 밟고...하는 식으로 탔습니다.

1년 후 동생도 그 자전거로 배웠는데 아버지께서 깔끔하게 오래 타셨던 자전거는 2년 만에 두 아들의 학습교재로 사용되고 폐기되었습니다.

저희 동네에서는 짐빠라고 하는 짐자전거가 있었습니다. 뒤의 짐받이를 넓게 하여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도록 한 자전거입니다. 앞도 조금 다릅니다. 왼쪽 사진처럼 생겼습니다.


자전거를 배운지 1년.
툭툭 치듯 패달질하던 저에게 도전과 위기의 시기가 왔습니다. 짐빠를 읍내까지 타고 가서 무거운 짐을 실어오는 미션이었습니다. 업무지시는 어머니가 내리셨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대범하신 것인지?

짐을 싣고 나니 뒤가 무거워 앞바퀴가 들리기도 합니다. 읍내에서 혼자 집으로 돌아옵니다. 툭툭 발판을 치며 천천히 자전거를 탔습니다. 내리면 혼자 다시 올라탈 자신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힘들어도 꾸역꾸역 갔습니다. 그 긴장감과 위기감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집까지 십리 길을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뿌듯했습니다!!

조금 더 익숙해지고 조금 더 자랐을 때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발판을 밟았습니다. 동네 아이들보다 늦게 배웠지만 탈 기회가 많아 조금 더 잘 탔습니다.

중학교 때도 3년 동안 며칠을 빼고 자전거로 등교하였습니다. 그 때는 이사 와서 읍내에 있는 중학교와의 거리가 2km 남짓 되었습니다. 아침에 버스랑 경쟁을 하기도 했는데 가당치도 않았지요. 그래도 장날에는 읍내까지 제가 빨랐습니다. 차가 많아 막혀서가 아니라 사람 태우느라 버스가 정차하는 시간이 길어졌으니까요..

제가 자전거를 좋아했던 이유는 차멀미 때문이었습니다. 버스로 장거리를 타고 나면 심할 때는 2-3일을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시달리기도 했으니 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중학교 이후 자전거와 멀어졌다가 서른 살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다시 자전거를 타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자전거 타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이젠 여럿이 타는 재미도 있고요.


쓰다 보니 제목과는 조금 다른 자전거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